"너무 적극적으로 도망가니까 제가 저 친구한테 가는 게 좋을까 생각이 들 정도에요. 시간이 지나면 마음을 열지 않을까요?"
지난 13일 오전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말 생츄어리(sanctuary.야생 적응장)에서 뛰어놀던 말 세 마리가 인기척에 가까이 다가왔다. 3000평 규모지만 1마리 당 적정 사육 평수가 1000평인 점을 고려하면 말들에게는 적당한 평수다.
취재진과 활동가들이 허술한 철제 울타리를 넘어서자 호기심에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이리저리 도망쳐도 기어코 따라왔다. 사람 냄새를 맡느라 바쁜 말의 머리를 쓰다듬으면 고개가 바닥으로 떨궈졌다. 기분이 좋다는 뜻이었다.
한편, 한 마리의 흰색 말은 멀찍이 떨어져 여물을 먹고 있었다. 2주 전 구조된 '늘봄'이었다. 이날 동행한 20여년 경력의 김정현 대한재활승마협회 소속 승마코치는 "말이 귀를 눕힌다는 건 화났다는 뜻"이라며 "구조된지 얼마 안돼 경계심을 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경마장 휩쓸던 경주마, 퇴역 후엔 '도축장행'
"마주도 처음엔 업체에 주문받았다면서 거절했거든요. 저희가 '말고기로 만들 바에 우리한테 넘겨라. 생츄어리에서 다른 말들이랑 잘 살도록 하겠다'고 설득시켰어요. "
퇴역 경주마인 늘봄은 지난달 30일 제주시 애월읍 제주축협 축산물공판장에 도착하기 직전 구조됐다. 국제동물권단체 페타(PETA·동물을 윤리적으로 대하려는 사람들)와 제주비건 소속 활동가들이 도내 이동 중 늘봄을 싣고 가는 트럭을 우연히 발견하면서다.
페타는 2019년 해당 공판장에서 촬영한 말 학대 영상을 폭로한 바 있다. 이들은 2018년부터 10개월 동안 제주에 상주하며 퇴역경주마의 도축 환경 실태를 잠복조사한 결과였다.
유튜브에 게시된 영상(link)에는 업자들이 둔기로 말을 때리거나, 다른 말이 보는 앞에서 도축하는 모습 등 경주업계에서 버림받은 말들의 잔인한 도축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큰 충격을 줬다. 이후 제주지역 승마·경마 현황 조사를 위해 다시 제주에 방문했다가 늘봄을 만난 것이다.
김란영 제주비건 대표는 "당시 말 소유주는 이로부터 약 한달 전 50만원에 늘봄을 구매, 말고기 전문 음식점에서 주문을 받고 도축장으로 이송하던 중이었다"며 "활동가들이 운송비 및 한달여간의 사육비 등 80만원을 지불하고 늘봄을 매입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2007년생 늘봄은 올해로 16살이다. 2009년부터 2010년까지 미국에서 경주마로 10회 출전한 뒤 이후 번식마로 분류돼 5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2018년 한국으로 수입돼 3마리의 새끼를 또 낳았다. 임신 상태로 수입되다 사산하기도 했다.
김 대표는 "미국은 이미 2007년 말 도축장이 전면 폐지됐다. 그럼에도 불법 도축을 시도하는 사례가 있어 동물단체가 이번 상황과 같이 구조하는 경우가 있다"며 "그러나 한국은 말 도축이 불법이 아니다. 특히 제주도내 도축장은 전국에서 제일 규모가 큰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사람들에 치근대던 퇴역경주마 황제는 흥미를 잃은 듯 멀리 가 풀을 뜯었다. 황제도 역시 구조마로, 대표적인 경주마 '더서러브래드'라는 종이다. 17세기 영국에서 단거리 경주 능력이 우수하게 개량한 품종이다. 늘씬한 다리와 목선 등 200여종의 품종 중 인간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부합, 영국인들 사이에서는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여겨진다.
김 코치는 "조선시대 백정이 소를 잡을 때도 예를 표하며 도축했던 게 기록으로 남아있을 만큼, 전통 한국사회는 서양처럼 물건 취급하지 않았다"며 "다만, 서유럽은 공장식 축산 등 비인도적인 축산업에 대해 반성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진척이 느린 상황"이라고 씁쓸해했다.
여전히 전무한 퇴역 경주마 보호관리 체계
"국내 경마산업은 국가 재정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산업이고, 일자리도 1만개 이상 창출하고 있어요. 그런데 왜 핵심주역인 경주마는 마지막까지 이용만 당하다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거죠?"
김 대표는 경주마가 퇴역한 이후의 삶 보장은 물론, 복지체계 구축 등 도의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마산업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이익을 가져가는 만큼 경주마에게도 합당한 대우를 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현실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농립축산식품부에 따르면 2019년부터 2022년까지 매년 평균 2000여마리의 경주마가 은퇴하며, 그 중 제주마를 제외한 더러브렛의 평균 44%가 폐사했다.
살아남은 말에 대한 보호 관리 체계도 부재한다. 대체로 승마장으로 팔려가거나, 번식용으로 쓰인다.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확인할 수 없는 ‘용도 미정’ 퇴역마는 지난해 기준 13%에 달한다.
육지부 퇴역 경주마도 꾸준히 제주로 반입, 도축되고 있다. 고태민 의원이 제주도의회 제421회 임시회에서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21년 348두, 2022년 242두에서 올해는 138두(8월말 기준)가 제주에서 도축돼, 반려동물 사료 등으로 활용되고 있고 있다.
이에 제주비건을 포함한 전국 동물단체의 지적으로 지난 2월 동물보호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발의됐다. 경주마 소유자가 퇴역 후 보호 및 관리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지난 3월 개정안은 철회됐다가 5월 재발의 됐다.
그러나 한국마사회, 마주협회 등은 이에 반발 중이다. 특히 서울마주협회는 재산권 침해 등을 이유로 반대 청원서까지 제출한 상태다.
특히 한국마사회는 2019년부터 경마.동물.복지.법률 분야 전문가로 구성된 말복지위원회를 운영하고, 지난해엔 '말 복지 세부 가이드라인'을 발표한 바 있다.
가이드라인에는 '교배.번식' 및 '퇴역' 단계를 거치는 말들을 존중한다는 차원에서 관계자들이 준수해야 할 기준을 제시한다. 그러나 경주마는 개인 소유로 퇴역 이후 용도변경 및 관리처분을 강제할 수 없어 '무용지물'에 그쳤다.
김 대표는 "기본적인 법안 발의를 반대하며 말 복지를 운운하는 것은 비인도적이며 동물보호의 최소한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라며 "이는 경마산업이 얼마나 비정한 산업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이어 "한국마사회와 경마산업 관계자들은 경주마, 퇴역경주마 보호에 대한 시민들의 요구를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