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에는 입맛을 돋구는 먹거리가 필수다. 페스티벌이 열리면 광장에만 들어서도 '고기 굽는 냄새'가 솔솔 난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자극적인 냄새를 맡기 힘들다.
우유 대신 캐슈넛으로 만든 버터와 아이스크림, 현미떡에 채소로 맛을 낸 떡볶이, 햄 대신 콩고기를 넣은 샌드위치, 계란을 빼고 코코넛 오일로 만든 빵 등. 모두 식물로만 만들어진 음식이다. 하지만 맛에 있어서 부족함은 없다. 행사에 방문한 박정아(32.제주시)씨는 "비건음식은 고기와 다른 결의 풍미가 있어 공백이 없지만, 훨씬 깔끔하다"고 말했다.
방문객들은 플라스틱과 비닐 대신 각자 챙겨온 개인컵과 다회용기에 포장한 것들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광장 가운데서는 오카리나 선율이 흘렀다.
지난 13일 오후 3시 30분부터 7시 30분까지 제주관광대 컨벤션홀 일대에서 '2022 제주 비건페스티벌'이 열렸다. '기후위기 대응·채식 활성화를 위한 제주도민연대(이하 도민연대)'가 주최했다.
'비건(vegan)'하면 육식을 피하고 식물을 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는 사람만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단순히 음식에만 한정해 인식하면 오산이다. '비거니즘'을 지지하고, 실천하는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비거니즘은 동물을 착취해 생산되는 모든 제품과 서비스를 거부해야 한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동물권을 옹호하며, 종차별에 반대하는 사상이나 철학이다.
특히 비거니즘 실천은 의식주를 비롯해 일상의 모든 영역에 적용된다. 동물성 원료를 사용하거나 동물실험을 시행한 화장품, 낚시·승마 등 동물을 착취하는 스포츠나 전시.체험 등의 문화생활 등을 반대한다. 동물의 삶을 배려한다는 측면에서 동물권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날 행사장에는 30여곳의 부스가 입점했고, 2000여명이 방문했다. 입구에 들어서자 이화여대 윈도우스트라이크모니터링팀과 광주광역시 동물권 단체 '성난 비건'이 야생 조류 유리창 충돌 원인과 저감방안, 조사방법 등에 대해 상세히 소개하는 부스가 눈에 들어왔다.
한켠에는 유리창에 부딪혀 두개골 골절 등으로 세상을 떠난 새들을 추모하는 공간도 마련됐다.
이외에도 갖가지 비건 음식들을 비롯해 식물과 해조류 등을 원재료로 비건 인증을 받은 화장품, 오가닉 천으로 만든 공예품, 해양쓰레기로 만든 업사이클링 소품 등도 소개됐다. 일부 셀러는 수익금을 유기동물 복지단체에 기부할 것이라고도 했다.
로컬 농산물과 비건 레트로트 식품, 비건을 주제로 한 잡지 등도 판매되고 있었다. 미처 텀블러를 챙기지 못한 방문객들을 위해 다회용컵 대여 부스, 비건건강 상담 부스 등도 마련됐다.
행사 시작 1시간 후부터는 이정순 오카리니스트와 권우근 퍼커셔니스트, 최승열 싱어송라이터, 가수 장필순씨의 공연도 이어졌다.
아들과 함께 온 최모(40대·서귀포)씨는 "건강관리를 위해 식단을 조절하다 (계란과 유제품을 허용하는) 락토 오보를 지향하고 있다. 여기서 파는 빵들은 유제품도 들어있지 않아 속이 더부룩하지 않다"면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끔 고기를 먹을 때도 있는데, 이곳은 분위기 자체가 비건지향적이라 마음도 편하다"고 전했다.
관광객 한윤주(27·인천)씨는 "수도권에서 비건 관련 행사가 열리면 꼭 방문했다. 제주에서 '한달살기'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비건페스티벌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왔다"면서 "완전 채식을 하고 있진 않지만 환경을 위해서라도 필요성을 느낀다. 환경친화적인 이미지의 제주에서 이러한 행사가 열리는 게 의미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행사를 주관한 김란영 ㈔생명환경권행동 제주비건 대표는 "이번 행사는 시민단체가 함께 의견을 모으고 진행했다는 점이 가장 의미가 크다. 판매셀러 부스 등도 도민의 손으로 만들어진 제품이거나 도내 업체로 구성됐다"면서 "비건문화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준비해 감회가 새롭다"고 전했다.
이어 "행사를 홍보할 때 참여자들이 일회용품이 아닌 다회용기와 텀블러 등을 지참하도록 했는데, 다행히 대부분 협조를 해주셔서 쓰레기가 없는 축제가 됐다"고 말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비거니즘 실천을 어렵게 느낀다. 이번 축제로 '비건 별거 아니네. 나도 충분히 하겠다'고 쉽게 생각했으면 좋겠다"면서 "쉽고 재미있고 타인에게 권유하는 좋은 선택, 기후위기 뿐만 아니라 개인의 건강과 동물이 고통받지 않는 세상에 큰 기여를 하는 것이 비건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특히 공장식 축산 분뇨로 지하수가 광범위하게 오염돼 있는 제주의 물과 숲, 바다를 지키기 위해서 비건만큼 옳은 선택은 없다고 생각한다"면서 "많은 도민분들이 비거니즘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도민연대는 이날 행사를 비롯해 지난 8일부터 14일까지 '비건위크'를 통해 ▲비건요리 품평회 '나의 비건요리를 소개합니다' ▲동물 이야기를 나누며 곶자왈 숲을 겆는 '모든 동물들의 삶터, 지구에 발을 맞추다' ▲동물권 전문가 포럼 ▲청소년 비건 요리캠프 ▲동물에 대한 사유를 주제로 이야기하는 '동물 시민의 편지'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도민연대는 △생명환경권행동 제주비건 △식생활교육제주네트워크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제주지부 △제주녹색당 △제주대안연구공동체 △제주아이쿱소비자생활협동조합 △제주여민회 △제주주민자치연대 △제주친환경농업협회 △참교육제주학부모회 △한라아이쿱소비자생활협동조합 △한살림제주소비자생활협동조합 △㈜농업회사법인 밥상살림 등으로 구성돼 있다.